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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 01

고려정공?? 현대정공!!

초기 신설회사 설립 작업은 1977년 봄부터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먼저 본사 사무실을 확보하기 위해 여러 곳을 물색한 끝에 서울 종로구 종로 3가 175-4번지의 세운상가 4층을 임대하였다. 본사 사무실 확보와 함께 창립발기인이 구성되는 등 회사설립을 위한 제반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회사이름은 정주영 회장이 처음에는 '한국정공'이라고 정해주었는데 다른 중소기업에서 이미 그 이름을 사용하고 있어 부득이 '고려정공'으로 변경하였다. '정공'이라는 명칭도 정회장이 정했는데 당시 일본에 자주 출장을 다니면서 정밀공업을 하던 기업들이 '정공'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던 점에 착안된 것이었다.

1977년 6월 25일 고려정공은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사업목적 등을 확정하였다. 이어 7월 1일에는 임시 주주총회를 개최하고 상호변경 안건을 처리하였다. 그리고 이날 의결을 거쳐 회사의 상호를 '고려정공'에서 '현대정공'으로 변경하였다.

컨테이너 수주를 위해 그동안 현대중공업의 명의를 사용해 온 만큼 신설회사도 외국 바이어들의 신뢰 확보를 위해 '현대'라는 상호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때문이었다.

EP. 02  현대종합기계'로 사명이 바뀔뻔한 사연

EP. 02

현대종합기계'로 사명이 바뀔뻔한 사연

1980년대 중반, 사업구조 고도화를 위해 현대정공은 다양한 신규사업을 모색하였다.

1985년 프레스 개발, 정밀 베어링, 모터사이클, 1986년 골프카,공작기계,특수 컨테이너(알루미늄/냉동),대형 휠,중기변속기,특수 트레일러,엔지니어링 플라스틱,1987년 상용차용 변속기와 항공사업,건설 중장비,금형제작사업 등 해마다 다방면의 신규사업을 검토하였고 이중 타당성이 검증된 사업부터 실행에 옮겼다. 이후 1980년대 후반까지 전개된 사업다각화의 핵심은 그동안의 노동집약적인 아닌 기술집약적 산업을 취한다는 원칙 아래 정밀기계공업 분야와 자동차 분야를 주력사업으로 육성한다는 방침에 따라 진행됐다. 이에 따라 현대정공은 공작기계,상용차용 변속기,사출성형기,소형엔진,4륜구동 자동차와 특장차,항공사업 등 고부가가치 산업에의 참여 검토를 마치고 각각 별도의 전담 추진부서를 구성, 사업을 추진해나갔다. 이렇게 새로운 아이템으로 사업을 바꾸면서 자본이 필요해 현대정공은 1989년 9월 5일 기업을 공개,국민적 기업으로 성장해왔다.

이처럼 1980년대 후반 신규사업을 의욕적으로 확장해가면서 회사상호를 변경하는 문제까지 검토하였다. 현대정공이 영위하고 있는 대표적 사업아이템이 9개에 이르렀고 사업부문 하나하나가 별개의 회사처럼 특성이 강하다 보니 종합기계회사다운 면모가 강하였다. 따라서 현대정공이라는 이름이 그다지 맞지 않는다는 의견에 따라 상호를 현대종합기계로 변경하기로 하고 CI작업까지 추진하기도 하였다

EP. 03  태평양을 횡단한 제1호 요트 '파랑새'

EP. 03

태평양을 횡단한 제1호 요트 '파랑새'

현대정공은 1982년 4월 2일 요트를 비롯한 구명정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던 그룹계열회사인 경일요트산업을 흡수합병하면서 요트사업을 시작하였다. 정몽구 사장은 당시 국내의 해양 조선산업의 발전과 수입대체 효과 등을 볼 때, 구명정을 비롯한 세일요트,FRP어선 등의 제품은 상당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 시장상황만 호전되면 성장산업으로 육성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요트사업은 여러모로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많은 관심과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1980년 5월 영포동 공장에서 생산한 제1호 요트인 '파랑새'를 타고 노영문 설계과장과 친구 1명이 울산을 출발, 장장 3만리의 태평양 횡단 끝에 75일만에 미국 LA에 입항해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이 항해 모험은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사업으로 후원을 받아 시도되었는데 세계 각 언론들은 한국 젊은이들의 패기와 도전 의혹을 높이 치하하는 기사를 전하였다.

EP. 04  최초의 해외 현지법인은 HYSI

EP. 04

최초의 해외 현지법인은 HYSI

현대모비스 역사상 첫 해외 현지법인은 1984년 9월 19일 미국 LA 근교에 설립된 HYSI(Hyundai Steel Industries Inc.)였다. 당시 현대정공이 100% 투자해 설립한 이 법인은 1982년부터 경기가 되살아나고 이와 더불어 트레일러 수요의 증가로 미국의 컨테이너 고객들이 컨테이너를 실어 나를 수 있는 트레일러까지 제작해 줄 것을 요청해 오면서 비롯됐다.

이에 따라 현대정공은 수출용 트레일러 사업을 특화하기로 하고 국내에서 트레일러의 섀시와 부품을 생산, 반제품을 수출해 미국 현지 법인에서 조립,판매하는 사업을 추진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시장상황의 변화와 인건비 상승 등으로 채산성이 약화되자 1989년 10월말 생산을 종료하였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컨테이너를 본격적으로 생산하는 해외 현지법인을 설립했는데 바로 멕시코에 설립한 HYMEX(Hyundai De Mexico 5.A.De.CV)였다. 멕시코는 해외자본 유치에 적극적이었고 인건비도 저렴할 뿐 아니라 미국과 인접해 있어 물류비도 절감하는 등 장점을 두루 갖춘 곳이었다.

EP. 05  컨테이너 신화를 창조한 '110일 작전'

EP. 05

컨테이너 신화를 창조한 '110일 작전'

세계 컨테이너 시장을 호령하며 현대정공의 이름을 세계만방에 알린 신화창조의 기원을 더듬어보면 이렇다. 컨테이너 사업에 관한 검토는 이미 1976년 5월부터 시작되었다. 정몽구 사장은 국내 수출산업의 성장에 따라 컨테이너 사업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 아래 이 사업을 강하게 밀어 붙였다.

일단 사업추진이 결정되자 공장건설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1976년 11월 10일을 공장건설 개시일로 삼아 이 날짜의 이름을 따서 '110일 작전'이라는 이름 아래, 현대그룹 특유의 돌관(突貫)작업 방식으로 공장건설을 추진하였다. 당시 공장부지로 선정된 울산 매암동은 야트막한 야산에 배밭이 조성되어 있었다. 온통 잡초만 무성한 황무지 자체였다. 공장건설을 위해 파견된 직원들은 당시 갑산여관에서 주숙하며 우선 3층짜리 본관건물을 짓는 것을 시작으로 공장 틀을 갖추고 부지 정지작업에도 착수하였다. 이런 노력을 통해 불과 3개월만에 황무지는 반듯한 공장으로 변모하였다.

당시 몇 명 되지 않는 직원이었지만 설비며 기술,레이아웃,수주 등을 위해 모두가 세계 각지를 뛰어다녔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려는 자신감과 보람으로 지칠 줄 모르고 달렸다. 특히 공장건설과 동시에 수주 받아 1977년 3월 17일 처음으로 생산했던 40피트 C 컨테이너 50대는 회사의 컨테이너사에 길이 남을 제품으로 기록되고 있다.

EP. 06  현대정공이 생산한 컨테이너의 총 높이는
에베레스트산 높이의 770배!

EP. 06

현대정공이 생산한 컨테이너의 총 높이는
에베레스트산 높이의 770배!

1977년 3월 17일 제1호 컨테이너 제품을 생산한 이래, 2000년 8월 30일 국내생산을 종료하기까지 23년 6개월 동안 현대정공이 생산한 컨테이너는 총 266만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1개)였다. 이는 전 세계 공급량의 30%에 해당하는 실로 어마어마한 물량이었다. 현대정공의 역사는 한 마디로 주력사업인 컨테이너를 지렛대 삼아 종합기계전문기업으로 성장하는 토대를 구축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정공이 생산한 컨테이너를 모두 한 군데로 모아두면 대체 어느 정도의 규모일까?

현대정공이 생산한 총 266만 TEU의 컨테이너를 한 줄로 놓으면 길이는 1만 6,200km로, 지구의 반 바퀴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길이이다.

또한 높이로 치면 6,900km로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 높이의 770배에 이른다.

EP. 07  현대문화가 녹아든 '정주영 공법'

EP. 07

현대문화가 녹아든 '정주영 공법'

비록 5년간 짧은 기간의 사업에 불과했지만 해선사업은 해당 선박의 활용도와 유명세때문에 대내외적으로 많은 화제를 남겼다. 대표적인 일화는 서산 간척지구 물막이 공사에 고선박 대형 유조선을 활용한 것이었다. 1984년 2월 26일 시행된 이 공사는 당시 정주영 회장의 아이디어로 진행되어 일명 '정주영공법'이라는 용어를 낳기도 하였다.

서산의 경우, 조석간만의 차이가 크고 밀물시의 유속이 매우 빨라 육상장비를 이용해 방조제를 축조하려던 엄청난 비용이 예상되었다, 때문에 공사비 절감과 안전시공을 모색하던 정회장은 대형 유조선으로 조수를 막으면 될 것이라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내놓은 것이다. 세계 건설 역사 상 최초로 고선박 유조선을 이용한 획기적 공법의 도입은 언론을 비롯한 각계의 관심을 모았으며 이를 통해 50여억원의 비용절감을 가능케 하였다.

이날 동원된 배는 울산에 정박시켜 두었던 22만 6,000톤급의 스웨덴 유조선(길이 332m,폭45m,높이27m) 워터베이호였다.

EP. 08  세계 4번째로 개발한 '자기부상열차'

EP. 08

세계 4번째로 개발한 '자기부상열차'

현대정공은 경부고속전철사업을 전개하던 1986년부터 미래의 교통수단으로 세계적 주목을 받고 있던 자기부상열차의 개발을 독자적으로 추진하였다. 1986년 1월부터 기초이론의 조사와 함께 세부적인 기술조사에 착수한 현대정공은 1987년에는 자기부상열차에 필요한 전자석과 컨트롤러, 선형유도 전동익 등 각 시스템 별로 기초시험과 특성 해석을 마쳤다. 이후 마북리 기술연구소의 시험동 건설을 마무리하고 1988년 7월부터 모형차 시제작에 들어가 이듬해 6월까지 자기부상열차인 HML-01호를 개발하는데 1차 성공한데 이어, 약 1년 6개월 동안 연구개발을 계속한 끝에 1991년 1월 HML-02호를 성공적으로 개발하고 시승식을 통해 일반에 공개하였다.

이어 자기부상열차 1단계 실용화대상을 1993년 대전엑스포 출품으로 잡고 독일의 크라우스마피아社와 기술자문계약을 맺은 후 40인승 HML-03호 개발에 피치를 올렸다. 연구개발비만도 총 200억원이 투자될 정도로 HML-03호의 개발은 전사적인 집념과 노력이 어우러진 자랑스러운 결실이었다.

자기부상열차는 현대그룹의 기술을 대표해 1993년 8월 7일부터 열린 대전 EXPO에 선보였고 이 기간 동안 13만명이 시승하는 등 성공적인 운행을 과시하였다. 일본,독일,영국에 이어 세계 4번째로 현대정공의 기술진이 개발한 자기부상열차는 '현대첨단기술의 결정체'라는 찬사와 함께 언론에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또한 최초로 자기부상열차 안에서 결혼식을 올린 한 쌍의 부부도 탄생할 정도로 많은 관심을 받았으며 국내외 많은 관람객들로부터 "역시 현대야"라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EP. 09  해를 따라 서쪽으로' 갤로퍼 대장정 315일

EP. 09

해를 따라 서쪽으로' 갤로퍼 대장정 315일

현대정공은 1991년 9월 25일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신차발표회를 개최, 그동안 베일에 가려있던 갤로퍼를 공개함으로써 4륜구동 자동차시대의 개막을 알렸다. 이듬해인 1992년에는 총 판매대수 2만 3,738대를 기록하면서 국내 전체 4륜구동 자동차 시장의 51.9%를 차지하였다. 또한 현대정공의 4륜구동 자동차산업은 매출액 규모도 2,755억 4천만원으로 회사전체 매출의 약 22%를 차지하는 주력사업으로 단숨에 올라서게 됐다. 자동차산업이 활기를 띠자 1993년 들어 자동차공장의 증설을 서둘러 2,200평 규모를 확장하고 생산과 판매의 상승추세를 이어갔다. 특히 1993년에는 홍보에도 많은 힘을 쏟아 갤로퍼를 타고 동방견문록의 루트를 밟는 '해를 따라 서쪽으로' 대장정 이벤트를 시작하였다.

이는 국내에서 처음 시도된 다큐멘터리식 광고로 원로여행가 김찬삼 교수 등이 실크로드를 답사하기 위해 자동차 지원을 부탁한 것이 계기가 되어 제작되었다. 이들은 인도의 뭄바이항구에서 출발해 35개국을 거쳐 최종목적지인 포르투갈의 카보다로카에 도착하는 장장 7만km를 무려 3백 15일 동안 국산차를 타고 달렸다. 현대정공은 대장정 광고를 1년간 시리즈로 방영함으로써 기업과 제품의 이미지를 크게 높일 수 있었고 이와 같은 초기 홍보 및 광고전략의 성공으로 갤로퍼는 단시일내에 4륜구동의 대명사가 되었다.

EP. 10  신궁 김경욱 선수의 퍼펙트 텐

EP. 10

신궁 김경욱 선수의 퍼펙트 텐

우리나라 양궁은 누가 뭐래도 세계정상이다. 현대정공 정몽구 회장은 지난 1985년부터 1997년까지 양궁협회 회장직을 4차례 연임했으며 현재는 명예회장으로 우리나라 양궁발전을 위해 아낌없는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이러한 정몽구 회장의 지원 아래,현대정공 양궁팀은 올림픽과 세계양궁선수권대회 등 각종 대회에서 신기록을 갈아치우며 양궁역사를 새로 써왔다.

김경욱 선수는 1996년 8월 1일 오전 5시(한국시간), 미국 애틀란타 근교스톤마운틴피크에서 열린 여자 개인전 결승에서 중국의 허잉선수와 격돌하였다. 결승에서 김 선수의 첫 화살은 10점 만점. 그러나 중국의 허잉 역시 10점으로 응수하였다. 두번째 역시 둘 다 9점. 초반의 팽팽한 긴장은 세 번째와 순서를 바꿔 쏜 네 번째 화살에서 깨어졌다. 김경욱이 두 발 모두 10점을 맞힌 반면, 허잉은 7점과 8점. 승부는 순식간에 5점차로 벌어졌다. 우승을 의식하게 되면서 김경욱은 이기식 감독에게 '팔을 좀 꼬집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긴장을 풀기 위한 나름의 처방. 다섯 번째 화살도 다시 9점 동점.

그런데 여섯 번째 화살에서 흔치 않은 일이 발생하였다. 허잉이 9점에 그친 뒤 나선 김경욱의 화살은 70m거리에 떨어진 과녁의 한복판 검은 점을 때렸다. 이 한 발로 표적 뒤 정중앙에 설치되어 있던 렌즈가 파손된 것. 장내 아나운서는 '퍼펙트 텐'이라는 소개와 함께 '렌즈 수리를 위해 잠시 경기를 중단한다'고 방송하였다. 한국 관중석에서 또 한번 함성이 터졌다. 세 발은 둘 다 모두 9점씩. 마지막 세 발에서 허잉은 10점과 9점 두 개를 맞히면서 분전했지만 자신감이 붙은 김경욱은 다시 '퍼펙트 텐'을 때리며 113:107, 압도적인 승리로 금메달을 움켜쥐었다.

EP. 11  고정관념을 파괴한 차종 '싼타모'

EP. 11

고정관념을 파괴한 차종 '싼타모'

갤로퍼 신화창조로 한껏 고무된 현대정공은 당시 전세계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한 미니밴의 국내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전략 아래 추진되었지만 다목적 미니밴 개발은 정부의 생산허가 지연으로 심한 산고를 겪었다. 국내 자동치 관련 법규상 승용과 승합의 분류가 어렵다는 이유로 기술도입 승인이 보류되자 현대정공은 처음의 계획을 유보하고 쏘나타 엔진을 탑재한 7인승 차량을 개발하기로 방향을 선회하고 1994년 12월 싼타모는 승합차라는 유권해석과 함께 기술도입승인을 얻음으로써 비로서 미니밴 사업에 진출하였다.

현대정공은 1995년 12월 16일 싼타모 전용공장을 준공하였고 22일에는 당시 현대자동차서비스 전시장에서 싼타모 신차 발표회를 가졌다. 싼타모는 2.0 SOHC 및 DOHC 가솔린 엔진을 탑재해 여유있는 힘을 발휘하고 세미 본네트 스타일에 넓은 실내공간을 다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비지니스용은 물론 레저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신개념의 자동차로 관심을 모았다.

특히 싼타모를 처음 본 사람은 이 차가 승용차인지 아니면 승합차인지 구분하는 것을 매우 곤란해하였다. 좌석의 숫자를 세어보면 승합차 같은데 스타일과 달리는 감각은 승용차와 다를바 없었기 때문이다. 싼타모는 차종의 개념을 애매모호하게 한 좀 과격하게 말하면 개념을 파괴한 차종으로 등장과 함께 충격으로 다가왔다. 외국에는 레저용 차가 흔했지만 당시 우리나라에는 승용차와 짚차,트럭이 차종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EP. 12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시간안에 성공시킨 '88전차'

EP. 12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시간안에 성공시킨 '88전차'

남북관계가 긴장 국면의 연속이었던 1970년대의 화두는 '자주국방'이었다.

자주국방을 위해서는 군사력에서 우월성을 갖춰야 했으므로 남북간에는 첨예한 군사력 증강경쟁이 벌어졌다. 특히 지상군인 육군의 전력증강은 가장 중요한 것이어서 탱크와 장갑차 등 주력무기의 증강은 핵심적인 요소였다. 이에 따라 한국군은 전차도입국에서 전차개발국으로 되기위한 결심을 하게 됐고 이 과정에서 현대에게 한국형 전차개발이 맡겨진 것이었다.

1975년 7월 28일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정주영 회장은 현대조선중공업에서 개발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초기에는 현대중공업에서 추진했고 1978년 10월 1일 현대차량 설립과 함께 이관되었다가 1985년 6월 1일부로 철도차량사업과 함께 현대정공에서 담당하는 과정을 거쳐 마침내 한국형 전차인 88전차가 탄생하였다.

88전차는 개념설계에서부터 탄생에 이르기까지 총 7년이 소요됐는데 이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시간안에 성공시킨 전차개발사례로 평가되었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자유세계에서 5위 안에 드는 자국 고유모델 전차생산국이 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현대정공은 1991년부터 시작된 제2단계 체계기술사업에서 독자적인 연구개발과 설계로 차세대 전차인 K1A1 전차 개발을 추진, 1999년 11월 15일 실전배치를 위한 양산에 들어감에 따라 우리나라가 명실공히 전차개발 선진국을 발돋음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EP. 13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HYUNDAI MOBIS'

EP. 13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HYUNDAI MOBIS'

최근 회사의 사명은 사업의 영역확대나 글로벌시대에 맞추어 현재의 의미에 부합하고 미래가치를 포괄하는 의미를 담아 변경하고 있다.

지금은 익숙한 이름인 모비스(MOBIS) 역시 새로운 사업영역을 개척해 거듭 태어나는 이미지를 알리기 위한 과정에서 탄생하였다.

사명변경은 1997년 3월부터 처음 논의되었다. 당시 거론된 이름은 현대차량. 1998년 5월에는 새로운 이름에 대한 CI제정이 논의되었고 국문이 아닌 영문 표기용 이름을 위해서 해외를 대상으로 수개월간 이미지 설문조사까지 실시하였다. 그러던 중 그룹 차원의 사업구조조정이 실시되자 사명변경작업은 보류되었다.
1999년에 구조조정을 거쳐 자동차부품 전문회사로 재탄생하면서 사명 변경작업은 다시 탄력을 받고 추진되었다. 이름을 새로 짓는 데에는 몇가지 조건이 있었다. 발음이 쉬울 것, 오래 기억될 수 있을 것, 짧고 간단할 것, 독창적일 것, 시각적 디자인에 용이할 것, 다중언어상의 의미를 고려할 것 등이 기본적인 요소라면 새롭게 전개하는 자동차부품사업의 특성을 반영하고 현대차그룹의 일원임을 상징적으로 담아내야 했다.

이에 '투킴(tookim)'이라는 디자인 개발업체를 선정하고 사업성격에 맞도록 이름개발부터 디자인까지 추진하도록 하였다.이 과정에서 직원들의 아이디어가 담긴 다수의 안을 최종적으로 검토해 사명을 현대 모비스로 부르기로 결정하였다.

모비스(MOBIS)란 말은 Mobile과 System을 결합한 합성어로 자동차를 뜻하는 Mobile과 복합적 기계장치의 통일성을 뜻하는 System을 결합해 '자동차를 이루는 수많은 첨단 부품시스템을 생산하는 자동차부품 전문기업'이라는 의미를 담았다.

EP. 14  무박 16일만의 섀시모듈 양산

EP. 14

무박 16일만의 섀시모듈 양산

현대모비스가 자동차부품업체로 거듭나면서 가장 고민했던 것은 단기간내에 세계적인 수준의 기술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과 기존 자동차부품업체들이 담당하고 있던 부분의 단순대체가 아닌 자동차부품 공급시스템 전체의 개선을 이뤄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에 따라서 탄생한 것이 바로 '모듈'이다. 1999년 8월 1일부터 현대차 울산공장 생산차종에 처음으로 섀시모듈을 공급하는 사업이 본격 추진되었다. 현대차 울산공장 내의 수출용 AS부품 창고(옛 현대정공 변속기공장)의 약 1만여 평 규모에 연간 30만대 생산규모의 생산라인을 갖추고 국내 최초로 직서열(JIS:Just In Sequence)공급방식을 통해 트라제 차종에 공급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첫 사업추진 과정은 현대모비스 내에 하나의 전설로 기억되고 있다. 양산까지 불과 16일을 남겨놓고 트라제 섀시모듈을 수주하였는데 현대차에서는 "우리가 해도 30일 내지 45일 소요되니 어려우면 포기하라"고 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현대모비스는 갤로퍼와 싼타모를 생산했던 경험을 믿고 밀어부쳤다. 주어진 시간은 16일밖에 없었지만 현대모비스는 결국 성공하였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무박 16일만의 양산'이었다. 이후 현대모비스는 2000년 아반떼XD 및 싼타페 섀시모듈을 잇달아 양산하였고, 2001년에는 라비타 섀시모듈을 공급하면서 공급 역량을 점차 키웠다. 이를 통해 완성차 생산라인에 대한 직서열 공급의 안정성과 효율성을 널리 환기시켰을 뿐만 아니라 품질관리, 재고감축, 라인증설 부담 경감 등의 유무형 효과를 강조함으로써 모듈화의 필요성을 제고해나갔다. 이렇게 발전시켜온 현대모비스의 섀시모듈 생산기술은 현재 다임러크라이슬러에 시스템적으로 결합된 신개념 섀시모듈을 공급할 정도로 크게 발전, 세계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EP. 15  힙합바지에 야구모자를 쓰고 동대문에 나타난 CEO

EP. 15

힙합바지에 야구모자를 쓰고 동대문에 나타난 CEO

현대모비스는 1990년대 후반, '선택과 집중'을 통해 대대적인 사업구조조정을 단행하였다. 다각화된 사업을 정리하고,'자동차부품 전문회사'로 변신해 이 분야에만 회사의 역량을 집중한다는 계획이었다. 당시 IMF로 어려워진 경영환경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시대의 흐름에 앞서 먼저 변해야 한다는 것이 경영진의 생각이었다.

이를 통해 현대모비스는 전체 사업의 97%에 이르는 사업부문을 과감히 구조조정하는 한편, 2000년에는 현대정공에서 현대모비스로 사명을 변경하고 '스피드경영' 등 다양한 경영혁신활동을 펼쳤다.

이같은 경영혁신활동을 속속 도입하던 어느 날 저녁, 당시 박정인 사장은 난데없이 임원들을 동대문시장에 집결시켰다. 신세대직원들을 이해하기 위해 임원들이 직접 신세대 문화를 체험해봐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동대문시장 집결지에 먼저 나가 있던 비서가 박사장을 알아보지 못하는 헤프닝이 벌어졌다.

박사장이 야구모자를 쓰고 거기다 힙합바지를 입고 나타난 것. 복장부터 신세대 스타일로 입어봐야 제대로 그들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동대문에서 일어난 이 에피소드는 당시 이를 우연히 알게 된 한 신문사 기자에 의해 기사화되어 세간에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EP. 16  콜롬버스의 달걀, 화상회의시스템

EP. 16

콜롬버스의 달걀, 화상회의시스템

현대모비스가 국내 대기업으로서는 처음으로 구축한 화상회의시스템은 마치 콜롬버스의 달걀과도 같았다. 누구나 생각은 했지만 실질적인 도입은 어떤 기업도 제대로 못했던 시절, 현대모비스는 과감히 달걀을 깨뜨려 2001년 3월 27일, 지금의 화상회의시스템을 오픈할 수 있었다.

화상회의시스템은 인터넷을 통해 멀리 떨어진 지역간 영상,음성 및 자료를 교환해 마치 회의실에서 회의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화하도록 해주는 시스템으로 신속한 의사결정과 업무 효율성을 제고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화상회의시스템을 첫 오픈할 때, 언론의 관심도 지대하였다. 최초의 시도이기도 했지만 굴뚝기업을 IT기업으로 바꾼 가장 큰 근본원인이 이것의 도입이었기 때문에 화상회의시스템을 다루지 않은 신문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현대모비스의 화상회의시스템은 2003년부터는 계열사와 협력사, 대리점 등에서도 운용하도록 했으며 현대기아자동차그룹에서도 이를 벤치마킹해 'M-Channel'이라는 그룹내 화상회의시스템을 운용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2001년 12월 31일에는 국내 기업 최초로 인터넷을 이용한 종무식과 시무식을 실시해 화제를 낳기도 하였다.
현대모비스의 이 같은 IT를 활용한 '스피드경영'은 종합기계메이커로서 무겁고 강한 기업이미지를 벗고 순발력 있고 경쾌한 기업이미지로 변환시켰으며 특히 우리나라 기업은 물론 정.관계 및 학계에서 성공사례로 소개되어 벤치마킹할 정도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EP. 17  모비스 임직원들의 월급에는 자투리가 없다.

EP. 17

모비스 임직원들의 월급에는 자투리가 없다.

월급명세서를 보면 지급되는 기본급이나 각종 수당, 그리고 공제되는 세금이나 보험료 등이 십원단위 혹은 원단위로 계산되기 때문에 보통의 경우 월급은 마지막 원자리까지 모두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현대모비스 임직원들의 월급은 '4,720,000원'혹은 '2,823,000원'식으로 천원이나 백원 단위 자투기가 없다. 바로 현대모비스 임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조성하고 있는 '모비스기금'때문이다.

현대모비스는 임직원들이 급여에서 이같은 일정 단위의 우수리를 공제한 금액과 그 금액만큼의 회사 지원분을 합쳐 매달 조성하는 900여만원(연간 1억원)으로 '모비스기금'을 적립, 교통사고를 당한 가정의 자녀들에게 고등학교 졸업까지 장학금을 지급해 오고 있다. 장학생으로 선정된 학생들은 학자금과 학업 지원금 및 교복 구입비 등으로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연간 230만원 가량의 혜택을 받는다.

현대모비스는 '모비스기금'외에도 '1본부 1가구 돕기'.'아름다운 가게 봉사활동'.1사 1촌 자매결연 맺기 운동'.'주니어 공학교실'등 다양한 사회공헌활동을 펼치고 있다.

EP. 18  현대모비스 물류창고 지붕은 평평하다.

EP. 18

현대모비스 물류창고 지붕은 평평하다.

자동차부품기업으로 거듭나면서 현대모비스가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물류인프라를 새롭게 구축하는 것이었다. 표준화창고는 물류혁신의 일환으로 2001년 4월 부터 적극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초기엔 외곽의 디자인과 색상을 고려하고 글라스 커튼월을 적용시켜 창고를 만들어냈다. 또한 전 세계를 돌며 개발한 지금의 바닥기법인 SFRC를 바닥에 적용하며 바닥충격에 대한 내구성과 평활도를 확보해 랙을 설치할 때 그 형태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효과와 함께 작업안정성을 확보하였다.

남은 과제는 지붕이었다. 평면지붕을 향한 새로운 도전이 시작됐다. 국내 대부분의 창고지붕은 삼각형으로 비스듬하게 되어 있다. 겨울에 눈이 많이 오는 지형적 특성을 고려한 때문이었다. 그런데 당시 박정인 사장이 국내보다 눈이 많이 오는 미국의 디트로이트와 시카고 지역에서도 평면지붕 방식인 것을 보고 관련 부서 직원들이 직접 가서 선진 건축기술을 배워오도록 지시하였다. 검토 결과 2002년 3월 미국 스티븐사로 가서 기술협의를 하였고 시행착오 끝에 기존창고에 비해 단열효과 1.5배 증가, 결로,누수현상 완전 차단,건물 디자인까지 우수한 창고가 탄생하였다. 비용절감,운영효율, 미관향상의 삼박자가 맞아떨어지는 그야말로 완벽한 창고가 만들어진 것이다.

EP. 19  다임러크라이슬러 경영진을 놀래 킨 최첨단 모듈공장

EP. 19

다임러크라이슬러 경영진을 놀래 킨 최첨단 모듈공장

해외시장을 확대해 나가던 현대모비스는 2004년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현대모비스는 2004년 8월 3일, 미국 오하이오州 다임러크라이슬러 톨레도공장에서 한규환사장이 참석한 가운데 컴플리트 섀시모듈 공급계약을 체결하였다. 우리나라 자동차부품 수출 역사 상 단일 품목으로는 최대규모인 8년간 총 4,300억원 규모의 계약이었다. 이날 주요 일간지들은 이 계약을 경제면 머릿기사로 장식했으며, 몇몇 경제신문에서는 사설을 통해 '역사적인 일'로 평가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현대모비스는 톨레도공장 부지 내에 약 350억원을 투자해 건설에 들어가 2005년 5월 1일 준공하고, 7월 24일부터 다임러크라이슬러의 대표SUV인 랭글러(Wrangler)차종에 컴플리트 섀시모듈을 공급하기 시작하였다. 톨레도공장은 다임러크라이슬러에서 자동차생산에 모듈화를 시도한 첫 공장일뿐아니라, 북미 자동차 역사상 최초로 컴플리트 섀시모듈을 적용한 사례로, 현대모비스의 모듈 기술력과 생산력,가격경쟁력을 세계적으로 입증 받은 결과였다.

다임러크라이슬러는 계약에 앞서 톰 라소다(Tom Lasorda)사장과 피터로젠벨트(Peter Rosenfeld) 전략구매 담당 부사장 등이 2004년 7월 20일 이화모듈공장을 방문해 모듈 생산시스템과 생산능력, 물류 등을 직접 참관하기도 하였다. 이때, 다임러크라이슬러의 경영진들은 현대모비스의 전혀 새로운 방식의 모듈생산방식과 자동화시스템에 무척 놀라워하였다. 이와 함께 최고경영층이 직접 프리젠테이션을 하면서 적극적인 사업의지를 표시하였고, 프로젝트 초기부터 설계,개발,생산기술,영업 등 전 부문의 협조체제를 구축하면서, 다임러 크라이슬러와의 컴플리트 섀시모듈 공급계약에 성공하게 된다.

EP. 20  역시, 브라질 축구는 강했다

EP. 20

역시, 브라질 축구는 강했다

현대모비스는 2010년 11월부터 브라질 공장 건설에 착수하며, 남미시장을 장악할 거점 확보에 나섰다. 정예요원으로 선발된 6명의 현대모비스 직원들은 직접 현장에 찾아가 언덕배기의 사탕수수밭을 확인한 후 이 곳에 튼튼한 공장을 세우는 데 돌입하는 일부터 서둘렀다. 이들이 빠르게 작업에 착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브라질로 떠나가기 전부터 서울 본사에서 남미 공장 건설 프로젝트에 대한 준비를 차곡차곡 쌓아왔기 때문이다. 이를 알 리 없던 여타 기업들은 목표한 2011년 준공은 불가능하다며 너스레를 떨었지만, 현대모비스는 일 년 만에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하지만 준비기간 동안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현지인들의 문화와 삶을 이해하고, 이에 흡수되어 하나의 팀을 만들어내는 게 급선무였다. 실제 기공식은 2012년 9월에 이루었는데, 그전까지는 바로 공장을 정상적으로 가동하기 위해 인원을 채용하고 현지인을 교육하는 일에 힘을 쏟았고, 이들과 서로를 이해하는 동료가 되는 방법을 간구하는 데 부단히 노력했다.

그 방법 중 가장 효과가 좋았던 것은 첫째도 축구요, 둘째도 축구였다. 현대모비스 직원 중에서도 축구를 잘 하기로 소문난 직원들이 많았기에 경기를 주관하고 나자 서로 간의 경쟁심에도 불이 붙었다. 이름 하야 브라질 챔피언스와 현대모비스 풋살의 대결. 결과는 현대모비스의 처절한 패배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후 함께 구장을 달리며 흘린 땀은 고스란히 동료애로 발현되었고, 최고의 팀워크와 이해관계를 맺는 밑거름이 되었다.

한편 이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브라질 전략차종 HB20의 성공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이야기를 나누고, 음악을 들으며, 언제 어디서나 춤 추길 즐기는 브라질 사람들의 습성에 전략을 더해 특별한 블루투스 오디오 시스템을 도입한 것.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기존보다 넓은 LCD 창을 도입하고 블루투스를 등 신기술을 장착해 자동차 안에서도 음악을 즐길 수 있는 현지 니즈를 만족시키는 데 성공했다. 현재 HB20은 5도어 소형 해치백과 SUV(스포츠유틸리티), 스포츠형 모델 3종으로 판매되고 있으며, 변함없는 사랑을 얻고 있다.

2016년 브라질은 사상 최대의 경기침체를 겪는 중이다. 산업 수요도 눈에 띄게 줄고 해결해야 할 문제도 많다. 하지만 현대모비스의 생산능력(CAPA)는 여전히 줄지 않고 있다. 지난 2015년 판매한 HB20은 총 약 18만대 총 생산능력과 동일한 수다. 이처럼 현대모비스는 최고의 경쟁력으로 종횡무진 성장하는 가운데 글로벌 그룹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은 물론 남미 인근 국가로 수출을 시작하며 수출 확대 여부에 주목을 끌고 있다. 현지 직원들을 이해하고, 동료로서 함께 살아가는 것을 중시했던 현대모비스가 이뤄낸 쾌거이다. 단지, 변하지 않은 사실은 단 하나. 역시, 브라질 축구는 강했다.

EP. 21  완벽한 수소연료전지차를 위한 충주공장의 노력

EP. 21

완벽한 수소연료전지차를 위한 충주공장의 노력

2013년 현대모비스는 수소연료전지차(FCEV : Fuel Cell Electric Car)의 주요 부품을 세계 최초로 양산했다. 수소연료전지차는 저장된 수소가 만드는 전기를 사용하기 때문에 기존 친환경 자동차와는 다른 독자적인 부품이 필요하다. 이 부품들 중 핵심 부품이 바로 연료전지 통합모듈(PMC / Power Module Complete)이다.

현대모비스가 현대자동차에 납품하는 PMC는 개당 수천 만 원에 달할 정도로 고가의 제품이다. 제품 하나가 차 한 대 값에 달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할 경우 그 손해는 어마어마하다. 때문에 운반 과정도 그 어느 때보다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당시, 현대모비스 경영층은 충주공장에서 울산공장까지 PMC를 운반하는 과정에서 제품에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없는지 조사해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PMC는 지정된 납품 용기에 넣어서 차량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문제가 어떻게 발생하는지, 피해나 손상이 생기는지 알아내기 힘들었다.

고심 끝에 찾아낸 방법은 바로 면압지를 활용하는 것. 면압지는 압력을 가하면 압력별로 색깔이흰색에서 여러가지색으로 변하는 종이이다. PMC와 납품용기에 이 면압지를 붙이면 색깔의 변화를 통해 주변에서 압력이 가해지는 지를 확인할 수 있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문제는 이동 시간. 충주에서 마북연구소를 들려 울산까지 가는 약 6~7시간 동안, 언제 어디에서 압력이 가해졌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수시로 제품을 확인해야만 했다. 방법은 담당자가 제품을 실은 공간에 동승해 계속 제품을 확인하면서 제품이 이상이 있는지, 충격이 가해지는지를 체크하는 것밖에 없었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원래 사람이 타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창문도 없고, 공기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짧은 거리도 아니었기에, 쉽사리 행동으로 옮기기 어려웠다. 하지만 ‘완벽한 제품의 납품을 위해서라면 이 한 몸 희생하겠다’는 담당자의 굳은 각오 덕분에 무모하게만 느껴졌던 이 계획은 결국 실행에 옮겨졌다. 충주에서 출발한 차량은 울산으로 향하는 도로 위에 있는 휴게소마다 정차했다. 답답한 공간에서 장시간 버티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신선한 공기를 마시러 차량 밖으로 나온 담당자는 그 잠깐의 달콤한 휴식 시간 동안에도 제품의 이상 유무를 먼저 확인했다. 생리현상 등 갑작스러운 일이 발생할 경우에는 차량을 두드리거나 운전자에게 전화를 걸어 차를 멈추어달라고 부탁했다. 가고 서고를 반복한 끝에 차량은 간신히 목적지인 울산에 도착했다. 당초 예상 시간인 6시간을 훌쩍 넘어 10시간 정도가 걸려서 말이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이동 과정에서는 PMC에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현대자동차에 PMC를 납품, 투싼ix 수소연료전지차에 적용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노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EP. 22  자연과 공존하는 지속 가능한 삶을 꿈꾸다 '현대모비스 숲'

EP. 22

자연과 공존하는 지속 가능한 삶을 꿈꾸다 '현대모비스 숲'

현대모비스는 우리나라 대표 글로벌 자동차부품 전문기업으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진천군에 현대모비스 숲을 조성했다. 2011년 현대모비스는 숲 조성을 위해 사업장이 있는 지역을 대상으로 공모를 진행해 충북 진천군이 선정되었다. 2012년 현대모비스는 100억의 기부금을 출연하고, 진천군은 초평호 일대의 108헥타르(약 33만 평) 군유림을 제공하며, 특수법인 자연환경국민신탁은 숲 조성 및 관리를 담당하는 MOU를 체결하고, 본격적인 숲 조성 사업에 착수했다.

1년간의 대상지에 대한 자연환경, 자연생태, 인문환경 조사를 진행하고 기본계획을 수립해 2013년 4월 조성추진 기념식을 갖고 본격적으로 숲 조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생각만큼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진행되지는 않았다. 조성추진 기념식수를 한 후 현대모비스 숲에 실제로 실제로 나무를 심고 공사에 들어간 것은 그로부터 1년 5개월이나 걸렸다. 숲조성 승인과 인허가, 업체 선정 등 모든 과정이 우리의 기대와는 달리 천천히 진행되었다.

또한 숲 조성 과정에서도 어려운 점은 많았다.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의 변동이 문제였다. 계획과 달리 비가 많이 내려 예상치 못한 곳으로 물길이 나거나 가뭄으로 저수지의 물이 마르는 등의 난관에 부딪혔다. 무엇보다 힘든 건 현대모비스와 진천군, 지연환경국민신탁이라는 지향점이 다른 세 단체가 함께하는 것이었다. 의견이 상충하는 일이 잦았지만 '많은 사람이 숲을 찾게 해 환경의 가치를 느끼게 한다'는 목적은 같기에 한발씩 양보하며 일을 진행했다.

그 결과 식생경관디자인 숲(기원의 숲), 자연상생철학 숲(생각의 숲), 지질역사배움 숲(붉은 바위의 숲), 자연생태동화숲(요정의 숲), 수변경관투영의 숲(거울의 숲), 미래세대문화 숲(약속의 숲), 총 6개의 숲으로 이뤄져 있는 현대모비스 숲이 탄생했다. 숲 거닐기, 습지 노롯, 새들의 한해살이, 가족생태교실과 같은 다양한 체험행사도 운영 중이다.

현대모비스 숲은 1단계 공사가 완료된 2015년 5월부터 나들이객을 맞고 있으며 주말이면 3천 명 이상, 단풍철에는 5~6천 명 이상이 찾는 충북의 명소가 되었다. 특히 현대모비스는 1단계 완공 때부터 지금까지 봄과 가을마다 야외음악당에서 '현대모비스 숲 음악회 블룸블룸'을 개최하고 있다. 숲을 조성한 현대모비스의 정신과 가치를 전하기 위함이다. 현대모비스 숲은 2021년, 진천군에 기부 채납할 예정이다. 기부 후에도 기업의 사회적 책임 수행을 넘어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사회' 실현을 목표로 하는 현대모비스의 정신은 깊게 뿌리내려 푸른빛을 발할 것이다.

EP. 23  고정 된 업무개념을 버리고 새로운 영업활동으로 다가서다.

EP. 23

고정 된 업무개념을 버리고 새로운 영업활동으로 다가서다.

2014년 2월, 현대모비스는 최초로 일본에서 브레이크를 수주했다. 브레이크는 대부분의 회사에서 기존 공급업체를 섣불리 바꾸려 하지 않는다. 고장이 생기면 사람의 생명과 직결되는 안전제품이기 때문이다.

현대모비스가 일본에서 첫 브레이크 수주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 번째 이유는 형식적인 기존 영업활동을 버리고 고객과의 관계를 진심으로 개선해 나갔던 것,
우선 고객과 업무관계가 아닌 더욱 가까운 사이로 발전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매일같이 전화통화를 통해 가족보다도, 동료들보다도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결정적으로 가까운 사이로 발전할 수 있었던 계기는 사사로운 대화에서의 약속도 반드시 지킨 것이다. 평소 우스갯소리로 했던 “가족들과 함께 놀러 갈 테니 맛집 좀 소개해달라”는 말을 실제로 지킨 것이다. 가족들과 함께 일부러 고객이 있는 지역으로 여름휴가를 갔고, 고객은 현지 사람들이 가는 맛있는 식당도 소개해 주었고, 관광지를 같이 둘러보며 가이드를 해주기도 했다. 또한, 업무적으로도 고객의 편의성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고객요청 시, 일본 로컬업체 대비 보다 빠르고 보다 명확한 대응을 해가며, 해외업체이기 때문에 커뮤니케이션 부분에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인식을 초기부터 불식시켜 나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점점 고객과 업무내외 적으로서 친구의 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이후 현대모비스가 수주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허물없이 상의할 수가 있었고, 고객으로부터 그 답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두 번째 이유이다.

일본 자동차 업체가 원하는 신규 업체로서의 대응방법은 따로 있었던 것, 고객의 조언으로 우리는 고객 별 맞춤 전략을 세우기 시작했다. 바로 설계사상(Design Philosophy/設計思想)이었다. 일본 자동차 업체에서는 현대모비스의 역사와 글로벌 양산실적 보다는 현대모비스만의 제품설계에 대한 철학과 컨셉을 중요 시 했던 것. 당시 현대모비스에도 설계컨셉은 있었지만, 일본 자동차 업체에서 원하는 것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부족한 면을 보완하여 현대모비스만의 설계사상을 더욱 확고히 구축하기 위해 오랜 시간 노력을 기울였다. 밤낮없이 만든 이 설계사상 덕분에 추가적으로 다른 일본 업체와도 업무적 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 현대모비스만의 설계사상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또한 그 후 일본지역 만이 아닌 유럽/중국/북미 자동차업체에도 새롭게 만들어진 설계사상을 바탕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으며, 추가 수주성과도 거두게 되었다.

이렇게 인간관계 개선과 병행해 업무 효율성 개선이라는 투 트랙(Two-Track)을 새롭게 구축한 덕분에, 현대모비스는 일본 시장에서 처음으로 브레이크를 수주하는 쾌거를 이뤘다.

EP. 24  현대모비스 '자율주행자동차'에 도전하다!

EP. 24

현대모비스 '자율주행자동차'에 도전하다!

자동차 업계의 최대 화두는 '자율주행자동차'다. 현대모비스는 2009년 자율주행자동차의 선행기술인 ADAS(Advanced Driver Assistance Systems / 지능형 운전자 지원 시스템) 기술개발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2013년부터는 자율주행자동차 기술개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했던 초창기엔 어려움이 많았다. 연구를 위한 데이터가 부족해 인터넷과 책, 논문 등으로 밤새워 공부하며 기술개발에 몰두했다. 인력 확보도 문제였다. 당시는 자율주행자동차의 인지도가 낮았고, 전공자도 없었던 터라 인력 충원이 힘들었다. 그래서 연관 분야의 전공자를 채용해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했다. 연구 환경도 열악했다. 현대모비스는 도로 주행 시 생기는 여러 상황에 대한 데이터가 필요했다. 데이터 수집을 위해 구글 무인자동차처럼 차 지붕 위에 벨로다인(Velodyne)사의 라이더(Lidar/light detection and ranging)' 센서를 탑재하고 고속도로로 나갔다. 갑자기 끼어들거나 급정거하는 등의 교통 상황을 기대했건만 차들이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라이더를 장착한 차가 수상쩍어 모두 피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아쉽게도 기대했던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어려웠던 상황이 전화위복이 된 경우도 있다. 자율주행 시스템을 구현하는데 있어서 초기에 접근할 수 있는 기술이 고정밀 GPS이다. 현대모비스의 연구소가 마북의 산중턱에 있다 보니 GPS의 정확도가 평지에 비해 떨어졌다. 그래서 터널 안, 고가도로 밑, 고층건물 밀집 지역 등에서 생기는 GPS의 오차를 줄일 수 있는 추측방법 기술에 집중하게 되었다. 덕분에 현대모비스는 다양한 자율주행의 기술 요소 중 추측방법을 기반으로 한 측위기술에 큰 강점을 갖게 되었다.

자동차의 주행자동화 단계는 일반적으로 레벨 0~4, 총 5개의 레벨로 구분된다. 레벨 0에서 2까지는 자율주행이 아닌 ADAS로 분류되며 특정상황에서 운전자의 편의를 제공하거나 충돌위험 발생시 이를 회피하여 안전성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예를 들어 고속도로상에서 레벨2 시스템은 자율주행과 유사하게 손발이 자유로울 수 있다. 하지만, 운전자가 항상 주행 상황을 주시하고 개입여부를 판단해야 하므로 차량 스스로 판단하고 제어하는 자율주행 시스템은 아니다. 레벨3은 부분 자율주행 단계로 고속도로 주행과 같은 특정한 상황에서는 운전자가 주행 상황을 주시하지 않아도 된다. 레벨4는 완전 자율주행 단계로 운전자가 목적지를 입력하면 스스로 그곳까지 달려간다. 하지만 아직 레벨4 단계의 자율주행자동차는 없다. 현재 양산되고 있는 모든 차량은 레벨2 이하의 ADAS시스템이다. 자동차업계에서는 2020년 이후가 되어야 레벨3 단계의 자율주행자동차 양산모델이 도로 위를 달릴 것으로 예상한다.

현대모비스의 자율주행 분야는 현대자동차와의 지속적인 협력을 통하여 그룹사 차원의 공동개발이 진행 중이며 다양한 시연 및 제품화를 통하여 가시적인 개발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레벨1 단계인 SCC(능동주행시스템), SPAS(지능형주차보조시스템), LKAS(차선유지보조시스템) 등이다.
현대모비스는 2016년 6월 국토교통부로부터 국내 부품사로서는 최초로 자율주행차 임시 운행 허가를 받았다. 2020년 이후에는 레벨 3단계인 자율주행기술이 양산될 수 있도록 핵심요소기술과 부품 개발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EP. 25  주행시험장, 지역주민의 든든한 응원을 받다

EP. 25

주행시험장, 지역주민의 든든한 응원을 받다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면, 33.2만 평 대지 위에 새로운 길이 뚫리고 도로가 생겨났다. 현대모비스의 주행시험장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2014년 4월 착공을 시작으로 위대한 도전이 이어졌다. 내비게이션으로 찾기도 힘들거니와 우편물 배송이 어려울 정도로 외딴 곳. 현장 관리자와 작업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역사적인 ‘장소’를 완성했다. 주행시험장은 미려한 곡선을 따라 조성된 주행시험로 14개와 시험동 8개로 구성되었다. 이곳에서 시행 운전을 통해 제품 품질과 주행 환경, 동계 환경 검증이 이루어진다.

주행시험장은 신기술 개발과 품질 확보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고민과 갈증에서 비롯되었다. 기존에는 주행시험장을 대여해 틀에 박힌 주행 환경에 따라 시험을 했다면, 이제는 현대모비스만의 자체 주행시험 인프라를 갖추며 ‘기성복’에서 꼭 맞는 ‘맞춤복’을 입게 된 셈이다. 금세 변화하는 자동차 기술 시장에 더욱 빠르고 스마트하게 대처할 수 있는 기점을 맞이한 것이다.

주행시험장이 만들어지기까지 주민들의 반대가 심했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현대모비스는 세심한 관심과 정성을 기울였다. 특히 지척에 자리한 부석초등학교와 끈끈한 관계를 맺으며 어린이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비 오는 날 쾌적한 시야 확보로 보행 안전을 돕는 ‘투명우산’을 제공하는가 하면, 학예발표회에도 참여해 응원과 성원을 보내주기도 했다. 또 체육대회나 기원제 등 마을의 축제가 열릴 때마다 함께 기뻐하고 어우러지며 지역사회와의 동행을 이어왔다. 이처럼 현대모비스에 대한 우호적인 반응을 이끌며 지역주민의 미더운 이웃 같은 존재가 되었다.

현대모비스 역사상 최초의 도전, 물론 그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매 순간이 치열한 고민의 연속이었다. 선례가 없었기에 참고할 자료나 가이드가 전무했지만 직급의 고저 없이 생산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아이디어를 도모했다. 사소한 고민 하나도 함께 공유하며 완성도를 높여간 것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모비스 프로빙 그라운드 매니지먼트 시스템 (MPGMS, Mobis Proving Ground Management System)’. 모든 시험 차량에 GPS를 달고 관제실에서 제어할 수 있도록 한 시스템이다. 가령 시험 차량이 사고가 나면 알람이 울리고 카메라 줌업으로 문제점을 즉시 보여준 후, 관제실에서는 정확하고 오차 없이 자동화로 제어하게 된다. 2차 사고를 방지하는 안전한 시험 환경을 완성한 것. 이처럼 ‘도전’에 ‘아이디어’를 더한 행보는 현대모비스의 또 하나의 역사를 이끌었다. 보다 나은 연구 환경을 제공해 신기술을 확보하는 터닝 포인트가 될 주행시험장. 현대모비스가 오래오래 성장하기 위한 역동적인 움직임이 바로 이곳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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